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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똥 찼냐" "벽 보고 서있어"…간호사들 '태움' 실태

등록 2018-02-20 07:50:00   최종수정 2018-02-26 09:4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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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로 때리고 밀치는 등 폭행 다반사
"부모가 그렇게 가르쳤냐"…육두문자도
벽 보고 서 있기, 수간호사 가방 들기
"업무 과중으로 신규 실수 용납 안 돼"
"상향식 평가 도입으로 체질 개선 필요"

 【서울=뉴시스】박영주 이예슬 기자 = "간호학과 입학 때부터 '군기'는 잡혀 있었어요. 어느 날은 얼굴도 모르는 선배들이 불러 2시간 동안 쪼그려 앉아 뛰기에 엎드려뻗쳐를 시키는가 하면 하루는 반나절 동안 90도로 인사하는 법을 배우기도 했죠. 병원에 들어와서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어요."

 수도권 대학병원에서 첫 간호사 생활을 시작했던 A(33·여)씨는 신입 시절을 회상하며 "온몸을 태웠다"고 말했다. 대형 병원의 간호사가 됐다는 기쁨도 잠시 선배들의 '극한 가르침'으로 인해 "오늘 하루만 무사히 넘기자"는 마음으로 출근하기 일쑤였다.

 A씨는 "신규 때는 선배 간호사인 프리셉터(preceptor)에게 일을 배우는데 실수라도 하면 인격을 모독하는 발언들을 가만히 들어야 했다. 욕 받이가 된 기분"이라며 "나는 괜찮지만 '부모님이 그렇게 가르쳤냐'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정말 견디기 힘들었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같은 학교에서 다른 병원으로 간 친구들은 선배 간호사들에게 종종 맞기도 했다"며 "주로 차트로 머리를 '톡톡' 내려찍거나 손가락으로 이마를 밀며 '이따위로 일 할 거면 그만둬' 등의 말을 육두문자와 함께 퍼부었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 간호사가 설 연휴인 지난 15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로 발견된 가운데 간호사 간의 괴롭힘을 뜻하는 '태움' 문화가 논란이 되고 있다. 선임이라는 이유로 행하는 인격모독 등 언어 폭력이 신입 간호사의 목숨을 빼앗은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 제기된다.

 '영혼이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뜻에서 유래한 태움은 주로 병원에서 선배 간호사들이 신입을 가르치거나 길들이는 방식을 지칭하는 은어다. 생명을 다루는 간호사의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한 혹독한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몇몇 병원에서 유지되고 있지만 실상은 직장 내 괴롭힘과 다를 바 없다는 얘기가 나온다.

 대학병원 간호사 B(27·여)씨는 "볼펜 끝으로 머리를 툭툭 치거나 팔뚝과 등을 손바닥으로 때리는 선배 간호사들도 종종 있었다"며 "선임 간호사 중 한 명은 수시로 불러 '머리에 똥 찼냐', '개념이라는 게 있기는 하냐' 등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서울 내 대학병원에 근무 중인 C(30·여)씨는 "동료들하고 수간호사들 보면서 '쟤네는 인간이 아니다. 인간은 수간호사가 될 수 없다'는 말을 종종 한다"며 "동기들을 봐도 정상적으로 살겠다는 사람들은 다 나갔고 악으로 버티는 애들만 남았다"고 토로했다.

 한국간호과학회가 2013년 발표한 '병원간호사의 직장 내 괴롭힘과 직무 스트레스가 이직도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6개월 이상의 임상경력을 가진 병원 근무 간호사 161명 중 60.9%가 직장 내 괴롭힘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괴롭힘을 경험한 시기는 근무 경력 1년 이내가 58.1%를 차지했다.

 간호사를 중심으로 활동 중인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는 간호사들의 태움 경험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울었다는 이유로 6시간 동안 가만히 벽 보고 서 있었다", "신발 소리가 크다고 혼났다", "수간호사 퇴근할 때면 가방 들고 배웅해야 한다", "뛰지 않고 걷는다고 욕을 먹어야만 했다" 등이다.

 5개월 된 신입 간호사라고 밝힌 한 누리꾼은 "선임 간호사 몇 명은 정말 말도 안 되게 후배들을 태운다. 차트로 머리 때리는 건 다반사"라면서 "사고를 쳐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하는 신입에게 태움이라는 말도 안되는 문화를 앞세워 자괴감에 들게 한다"고 적었다.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도 간호사들의 태움 문화와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글이 올라왔다. 인력 보충으로 간호사들의 업무 과중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다. 18일 올라온 이 게시글은 하루 만에 약 1000명의 지지를 얻었다.

 전문가들은 태움 문화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력난을 해소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우리나라의 경우 간호사 한 명이 맡은 환자 수가 많고 업무가 몰리다 보니 신규 간호사들의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분위기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대한간호협회 관계자는 "간호사 조직이 폐쇄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는 데다가 생명을 다루는 직업이다 보니 태움 문화가 이어지는 것 같다"며 "인력 문제는 태움 문화의 주요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선진국의 경우 간호사 한 명당 4~7명의 환자를 보는 반면 우리나라는 1등급 병원도 12~13명의 환자를 본다. 선진국보다 노동강도가 2~3배나 된다"며 "신규들이 실수하는 걸 용납하지 못해 태움으로 엄격하게 가르친다. 그러다 보니 다시 신규 간호사들이 그만두는 악순환이 지속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업무량이 과다하고 제반 여건들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상명하복식 집단문화가 짓누르는 상황"이라며 "상향식 평가시스템 도입 등을 통해 아랫사람들도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조직 내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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