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인도 당한다…피싱 범죄 피해자 탓 아냐"…'1호 책임수사관' 김준형[서민 울리는 민생범죄⑬]
김준형 도봉경찰서 보이스피싱팀장 인터뷰"전재산인 수억원 잃고도 경찰을 못 믿어"진화하는 수법…'가짜 카드배송'부터 '자녀 사칭'까지
[서민 울리는 민생범죄] -고물가와 경기 침체가 겹치며 서민들의 생활고가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민생범죄가 기승을 부리면서 서민의 삶에 고통을 주고 있다. 대출 규제 강화로 금융 소외계층의 자금난이 극심해지면서 불법 사금융 피해가 급증하고 서민의 주거안전을 위협하는 전세사기 피해도 늘어나고 있다. 우리 사회에 깊숙이 파고든 보이스피싱은 최근 기술의 발전과 함께 더욱 진화해 피해자들은 더욱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뉴시스는 서민다중피해범죄 피해 실태와 대안을 짚어보는 시리즈를 기획했다. 글 싣는 순서 ▲불법사금융 덫(1부) ▲전세사기 늪(2부) ▲보이스피싱 지옥(3부) ▲마약 디스토피아(4부) ▲민생범죄 전문가 진단(5부) 〈편집자 주〉 [서울=뉴시스] 조성하 기자 = [서민 울리는 민생범죄] 보이스피싱 지옥(3부) "딸이 어머니가 이상하다고 신고해서 경찰이 출동했는데 정작 어머니는 피싱범 말만 듣고 우리가 가짜라며 믿지 않았어요." 김준형 도봉경찰서 형사과 보이스피싱팀장은 보이스피싱 범죄 수사 현장에서 매일 '심리전'을 벌인다. 경찰 신뢰도가 피싱범보다도 낮은 현실. 그는 "가장 안타까운 건 범인을 못 믿는 게 아니라 우리를 못 믿는 것"이라며 씁쓸하게 웃었다. 김 팀장은 전국 최초로 책임수사관과 전문수사관 마스터 자격을 모두 갖춘 수사관이다. 2018년부터 보이스피싱 수사를 시작한 그는 수사관이자 예방 활동가로서 일선 형사들과 함께 보이스피싱 범죄에 맞서고 있다. 피싱 수사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계기는 가까운 지인의 어머니가 2000만원을 잃은 사건이었다. 그는 "범인을 못 잡은 게 마음에 걸렸다"며 "그 사건이 지금까지 이 일을 계속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수법은 진화 중…'카드 배송' 등 피해자 맞춤형 시나리오로 보이스피싱 수법은 수사기관 사칭과 저금리 대출, 자녀 사칭 등으로 구분된다. 저금리 대출은 40~60대 생계 책임자들이, 수사기관 사칭은 20~30대 사회 초년생들이, 자녀 사칭은 40대 이상 부모들이 주로 피해를 입는다. 보이스피싱은 피해자의 이름과 주소 등 개인정보를 미리 확보한 후 피해자의 심리를 정확히 파고든다. 그리고 보이스피싱범들은 '가족도 수사에 연루될 수 있다' '검사 말을 듣지 않으면 구속된다'는 식의 협박을 반복해 피해자의 불안을 키우고 외부와의 소통을 차단해 심리적으로 고립시킨다. 김 팀장은 "가해자는 피해자의 약점을 공략해 감정적으로 지배한다. 바로 심리 지배, 일명 '가스라이팅'"이라고 설명했다. 김 팀장은 최근 가장 많이 발생하는 피싱 수법으로 '카드 배송형'을 꼽았다. 피의자들은 피해자의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 등 개인정보를 바탕으로 카드배송원을 사칭해 신용카드 배송 예정이라는 연락을 한다. 이어 '1544' 등으로 시작하는 카드사 대표번호를 모방해 피해자의 의심을 누그러뜨린 뒤 '명의가 도용됐다'며 불안을 조성한다. 이후 수사 협조를 빌미로 악성 앱 설치를 유도해 휴대폰을 원격 조종하고 계좌 정보를 탈취한다. 설치된 악성 앱은 피해자가 실제 경찰청이나 금융감독원 번호로 전화를 걸어도 범인이 이를 가로채 받아 응대하도록 치밀하게 설계돼 있다. 김 팀장은 "법조인 등 고지식층도 속을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하다"며 "정상 앱과 똑같이 만들어놓은 앱도 있다"고 말했다. 이런 범죄는 고립된 심리 상태에서 더욱 위력을 발휘한다. 김 팀장은 "텔레그램으로 연락용 휴대폰을 따로 개통하게 해서 가족이나 지인과 단절시키고, 검사와 금감원으로 위장한 범인들이 피해자의 심리를 지배한다"고 설명했다. ◆끝까지 가짜 검사 말을 믿은 보이스피싱 피해자
가장 충격적인 피해 사례를 묻자 김 팀장은 전 재산 수억원을 잃은 중년 여성을 떠올렸다. 이 50대 피해 여성은 '카드 배송'을 가장한 전화로 보이스피싱에 휘말렸다. 이 여성은 한 달간 범인에게 끌려다니며 4000만~5000만원씩 나눠 보낸 돈이 수억원이 넘었다. 딸이 경찰에 신고했고 김 팀장이 직접 피해자를 만났지만 이미 강력한 가스라이팅에 빠진 상태였다. 한 달간 피싱범의 지시에 따라 호텔에 머물며 연락용 휴대폰으로만 통화하고, '검사'라고 본인을 소개한 피의자의 지시에 따라 수천만원씩 송금했다. 김 팀장은 "정복 입은 경찰관을 봐도 '가짜 경찰'이라고 범인이 말하니까 믿질 않았다. 경찰서 앞에서 텔레그램으로 범인에게 보고하더라. 우리가 진짜 경찰이라고 해도 안 믿는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이 개입했을 때는 이미 전 재산이 사라진 뒤였다. 김 팀장은 "딸과 함께 경찰서에 와서야 모든 사실을 인지했는데 눈앞에서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피해자 중 일부는 범죄 사실을 인지한 뒤 극단적인 선택을 암시하기도 한다. 실제 죽음으로 이어지는 사례도 있어 억대 피해가 발생한 사건의 경우 팀장이 직접 수사를 맡고 있다. 피해자 대부분이 서민이라는 점도 보이스피싱 범죄의 비극적인 지점이다. 전세자금을 위해 모아둔 적금이나 자녀 결혼을 앞두고 준비한 예금, 심지어 집을 담보로 대출받은 돈까지 송금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김 팀장은 "시간이 지난 후 자신이 가스라이팅을 당했다는 사실을 인지하더라도, 이미 수억원의 피해를 입은 현실 앞에서 삶이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다. ◆하부조직원 검거는 범죄를 지연시킬 뿐…예방이 최선 수사 현실은 녹록지 않다. 김 팀장은 하부 조직원만 검거되는 구조적 한계를 털어놨다. 도봉경찰서(서장 김용환)는 형사과를 중심으로 전 부서가 협업해 전방위적인 보이스피싱 예방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일선 경찰서는 수거책이나 대포폰 명의자 등 하부 조직원 수사에 주로 집중할 수밖에 없어, 상선을 추적하려면 시·도청이나 서울청 전담 부서의 장기 수사가 필요한 구조적 한계도 존재한다. 이 같은 현실 속에서도 일선 수사는 일정 부분 범죄를 억제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범죄 자체를 완전히 차단하기는 어렵지만, 검거를 통해 피해 발생을 지연시키는 효과는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 김 팀장의 설명이다. 피해금 회수율은 매우 낮다. 특히 자금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구조 탓에 피해 복구는 사실상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김 팀장이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예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 김 팀장의 신념이다. 그는 피해자 대부분이 보이스피싱 예방 정보를 제대로 접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며 예방 앱이나 백신 프로그램을 적극 활용해 피해를 사전에 차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이스피싱 피해자 상당수는 범행 사실을 인지한 뒤 극심한 자책과 심리적 충격에 시달린다. 하지만 김 팀장은 이 같은 범죄는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으며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실제로 교수나 교사, 의사, 심지어 보이스피싱 예방 교육을 했던 공무원까지 피해자가 된 사례도 있다. 김 팀장은 "피해자는 절대 자책하지 말고 가족들도 비난보다는 위로와 지지를 보내야 한다"며 "피해 예방의 핵심은 두 가지다. 모르는 전화나 문자, 카카오톡은 반드시 의심하고 가족이나 지인과 꼭 상의하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끝으로 그는 "보이스피싱 수사는 뿌연 안갯속을 걷는 일과 같다"면서도 "그래도 경찰은 끝까지 추적할 것"이라고 말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